모호형 과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괴물이 된다는 점이지요. 해야 하긴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해서 엄두는 안나고, 그냥 두긴 뭐해서 일단 꺼내 봤다가 오늘은 아니지, 다시 덮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없거나, 시간이 충분치 않거나, 내 에너지가 부족해서죠.
그리고 하루이틀 지나고 억지로 기운을 내어 다시 또 열어보면 뭔가 아직도 시작하기 복잡합니다. 어렴풋이 생각들은 떠다니지만 그럴수록 더 복잡하게 느껴지고, 필요한 정보는 부족한 것 같고, 해야할 공부나 읽을 자료는 점점 가지를 치고, 그러니 다시 시간은 현저히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주말 지나 새 주가 되면 한층 곤란해집니다. 급하고 명료한 일들은 계속 생기고, 미완의 모호형 업무는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마음 저 구석에서 가르릉 불편하게 합니다. 결국 몹 정도의 아이지만, 성미만 돋구며 시간 보내면 중간보스급으로 커져버립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의 제목을 스냅샷 잡아둬라.
정확히 표현하면 define을 잘 하라는겁니다만 저렇게 표현하는게 와닿습니다. 모호한 일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일이 비선형입니다. 새로 얻은 정보로 기존 정보나 가설을 되먹임하거나, 수행중 타인과 커뮤니케이션 해야하고, 그 결과가 다시 프로젝트의 할일목록과 우선순위에 변경점을 발생시킵니다. 복잡계의 성격을 띕니다. 게다가 대개 마감 기한도 유동적인 경우가 흔하죠.
그래서 정의하는게 중요합니다.
첫째, 결승선을 정해라. 이건 어디쯤에서 끝낼지의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의 모양새면 성공일지를 정해둡니다. 제출할 상사나 수령자가 있으면 편합니다. 물어봐도 되고, 상상도 쉬우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과거 경험이나 주변 동료와 이야기해봐도 좋습니다. 중요한건 이걸 적어 놓으란겁니다. 적지 않으면 곧장 구석에 빠져 헤멥니다. 종착지는 랜드마크 역할을 줘야합니다.
둘째, 프로젝트 제목을 정해라. '신기능 계획' 이런식으로 제목을 정하면 이미 망한겁니다. 범위가 좁더라도 가장 구체적인 언어로 적어야 합니다. 나중에 고친다 생각하고 (제대로 진행되면 반드시 고치게 됩니다. 처음보다 더 알게 되니까요.) 좁게 적습니다. 제일 좋은건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때 떠오른 그 느낌, 그 문장입니다. 'MZ를 타겟으로 하는 새로운 상품라인은 최소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할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볼까?' 정도 착상을 날것으로 적고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괜히 남들 보기 좋게, 내 스스로 멋있어 보이게 하이컨셉으로 뭉뚱그리는 순간 괴물은 초대됩니다.
셋째, 중간 마감을 정해라. 일의 완성 이전, 나만의 중간 마감을 정해야 합니다. 시간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결과물의 진척도여도 됩니다. 소설의 완성이 아닌 챕터 마감 정도로 분할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회고하고 전체목적에 합치하는지 따져봅니다. 가급적이면 객관적인 피드백을 받습니다. 다음 챕터를 위한 진척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또한 의구심에서 좀 더 자유로우면 집중도 좋아집니다.
이게 복잡한 일 잘하는 방법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복잡해지고 내 자신감 떨어지지 않게 해야합니다. 커지지 않게 고정하고 분할하여 정복합니다. 복잡성을 단순성의 조합으로 치환하는 스킬을 사용합니다. 이건 연습으로 가능합니다.
이번 내용은 좀 깁니다. 글로 쓰다보니 뜻이 잘 전달되었을지, 도움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